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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 "가장 살고 싶은 도시로 만들고파"

"어바인을 전국에서 가장 살고 싶은 도시로 만드는 것이 목표다." 강석희 어바인 시장은 8일 오후 6시 시청에서 '2011년 시정 연설'을 통해 어바인시를 전국에서 가장 안전(safe)하고 스마트(smart)하며 친환경적(green)인 도시로 만들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강 시장이 지난 2008년 어바인의 수장이 된 이후 세 번째로 가진 이날 시정 연설은 시의회장을 가득 메운 200여 명의 방청객들의 박수가 수시로 터져 나오는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청중의 박수와 환호는 강 시장이 "대부분의 다른 시들이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어바인시는 수백만 달러의 예비비를 비축한 가운데 균형재정을 달성할 수 있었다. 핵심적인 공공 서비스를 그대로 유지한 가운데 공공치안을 강화하고 교육계를 지원하는 한편 단 한 명의 시 직원도 감축하지 않았다"고 밝히는 순간 최고조에 달했다. 이어 강 시장은 ▶비즈니스 활성화 ▶직업 창출 ▶아이셔틀 서비스를 중심으로 한 대중교통 활성화 ▶그레이트 파크 개발 등을 향후 주요 시정 과제로 제시했다. 강 시장은 올해 어바인이 시 승격 40주년을 맞는다는 점을 상기시킨 뒤 "앞으로의 40년은 또 다른 도전이 될 것이지만 우린 40년 후에도 여전히 어바인이 가족이 정착해 살며 일하기 좋은 도시가 될 수 있도록 만들 것"이라고 다짐하며 연설을 맺었다. 임상환 기자

2011-02-09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끝] "한인들 지지·격려 감사합니다"

우연한 성공은 없는 법 나는 능력보다 노력을 믿는다 처음 시장에 당선되었을 때 기쁨도 말할 수 없이 컸지만 잘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더 크게 밀려왔다. 그레이트파크 프로젝트가 그런 나의 어깨를 더 무겁게 만들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각오를 새로이 다지게 된다. 나는 어바인의 시장으로서 나를 선택해 준 시민들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통해 한국인의 근면함과 끈기 슬기를 보여줄 것이다. 또한 나는 앞으로 한국에서 태어나고 성장해 온 이민 1세 출신 시장으로서 한국과 미국의 소통에 기여하는 가교 역할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다. 한미간의 공조를 통해 한국이 더욱 발전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나의 조국이 경쟁력을 드높이고 내실을 다져 21세기의 경제대국으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를 위해 우선은 한국과 미국의 교역을 증진시킬 한미 FTA가 조속히 체결되도록 나름의 역할을 다하려고 한다. 한국의 기업인들을 초청하여 지역 경제인들과 접촉할 수 있는 채널을 만드는 것도 내 몫이다. 시장으로서의 임기가 끝나는 날 '40년 어바인의 역사에서 시정을 잘 이끌었고 훌륭한 리더십으로 시의 통합을 위해 헌신했으며 그레이트파크의 성공적인 진척에 씨앗을 뿌렸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그런 평가를 받기 위해 또 한인 이민자로서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기 위해 나는 오늘도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내 삶을 움직이는 원칙은 성실 최선 정직 화합 비전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원칙들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진리를 깨우쳤다. 나는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한 교육을 받은 평범한 지능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삶의 기본적인 원칙을 지키면서 최선을 다할 때 그 결과는 항상 평범 이상의 성취로 나타났다. 나는 '능력'보다 '노력'을 믿는다. 우연한 성공은 없기 때문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나의 꿈 어쩌면 영원할지도 모르는 꿈을 향한 나의 도전은 계속될 것이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글을 쓰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것은 내 자신이 아니라 내 주변의 수많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 당선을 위해 많은 힘을 보태준 국내외 친구들 미주후원회 그리고 나를 믿고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고 격려해 준 미주 한인동포들과 지지를 보내준 어바인 주민들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별로 뛰어난 것도 없는 내가 이렇게 주목을 받고 큰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은 끈끈한 동포애라는 절대적인 힘 덕분이었다. 아무것도 없이 허허벌판에 선 심정으로 정치판에 뛰어들었을 때 동포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그에 힘입어 지금까지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걸어올 수 있었다. 나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그간 해왔던 일보다 앞으로 할 일이 더욱 많을 것 같다. 그중에서도 가장 역점을 두고 싶은 과제는 미주 한인사회의 정치력 향상이다. 내가 세일즈맨 생활을 그만두고 한인사회에 발을 내디딘 이유도 주류 사회에서 대접을 받지 못하는 한인들의 현실에 대한 자각 때문이었다. 생각해 본 적도 없다가 들어선 정치의 길은 미국이라는 사회에서 한인동포들이 어떻게 하면 주류 사회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놓고 노력하던 끝에 다다른 것이다. 시장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아니 앞으로 어떤 일을 하든 간에 나는 한인사회의 정치력 향상에 주력할 것이다. 더불어 미주 동포사회가 한국과 미국 간의 긴요한 가교 역할을 수행하게 하는 데도 내 몫을 다할 것이다. 글을 쓰고 나니 별것 아닌 일을 너무 내세우지 않았나 하는 쑥스러움이 든다. 자랑처럼 비치는 부분이 있다면 그저 한 사람의 진솔한 이야기가 세련되지 못하게 표현된 것일 뿐이라고 널리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가감 없이 적어 내려간 내 삶의 이야기가 이 글을 읽는 분들 특히나 젊은이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다면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보람으로 여기겠다. 그리고 해외동포의 한 사람으로서 한민족의 긍지를 잃지 않고 자존감을 지키며 열심히 살고 있다는 점을 기특하게 여겨준다면 이 글의 목적은 다 이룬 것이다. 다시 한 번 내 마음속의 모든 분에게 뜨거운 감사를 표한다. 글=올림 출판사

2010-01-25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78] 성공적인 그레이트파크 위해 시장 재선 각오…이민역사 보여 줄 한국 문화센터 설립하고파

그레이트파크 내가 이곳에 애정을 쏟는 이유 그레이트파크는 단순한 공원이 아니다. 66만 제곱미터 규모의 스포츠 파크 안에 20개의 축구장과 10개 이상의 야구장 그리고 골프 코스가 들어서는 거대한 스포츠 복합 시설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약 4킬로미터에 달하는 인공 협곡과 놀이 시설 28만 제곱미터의 식물원 10만 제곱미터의 인공호수 1만 명을 수용하는 야외 음악당 다문화 센터 공항 역사 박물관 등 그야말로 엄청난 규모의 레저.문화 시설이 함께 들어선다. 이 프로젝트는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대역사이자 나 개인과 어바인 시의 미래 청사진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중대한 과업이다. 성공적 추진을 위해서라도 꼭 시장에 재선되겠다는 각오를 다질 정도로 나는 이 프로젝트에 빠져 있다. 내가 이 프로젝트에 특별한 애정을 갖는 이유는 또 있다. 바로 이곳에 조성될 다문화 센터 공간에 한국문화센터가 들어서길 바라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인 최초 시장'으로서의 소박한 꿈이자 사명감이기도 하다. 한인 이민의 역사가 벌써 100년을 넘어섰고 이민자의 수가 200만을 상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역사와 현주소를 보여줄 수 있는 그럴듯한 문화 센터는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다.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른 나라는 어떤가? 중국 커뮤니티는 미국의 대도시 어디에나 중국을 알리는 문화 센터를 갖고 있다. 이민 사회가 한국보다 훨씬 작은 일본 커뮤니티만 하더라도 본국 정부와 이민 사회가 힘을 모아 일미 박물관 일본 정원 등 일본을 알리는 다양한 문화 시설을 미국 곳곳에 조성해 놓고 있다. 그렇다면 미국이 세계에 내놓고 자랑할 만한 랜드마크가 될 것이 분명한 그레이트파크에 한국문화센터가 들어서야 할 이유는 자명하다. 현재의 우리는 물론이고 앞으로 한인 2세 3세 후손들이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겠는가. 또 타 민족들에게 한민족의 우수성을 알리는 데 이보다 맞춤한 명소가 어디 있겠는가. 미국에서 살다 보면 아직도 미국인들은 한국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들에게 한국은 아직도 전쟁 직전의 상태에 있는 나라이고 고아나 입양아를 양산하는 곳이다. 이러한 부정적 인식이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다. 유구한 역사와 세계 첨단산업의 메카로 올라선 한국의 발전상을 알리고 아울러 밝은 미래상을 보여주는 공간은 그래서 더 절실히 요구된다. 따라서 한인사회는 물론 한국 정부와 기업들의 관심과 협조가 필수적이다. 한인들의 우수성과 잠재력 개인적 능력의 탁월함은 이미 세계에서 공인받고 있다. 그러나 개인을 떠나 한인 커뮤니티 차원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여론이 분열되어 힘을 한데 모으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여서 큰일을 도모하기가 쉽지 않다. 중국계 커뮤니티는 중국 본토 타이완 그리고 홍콩 출신들로 나뉘어 있지만 이민자들과 기업인들이 힘을 합쳐 커뮤니티 센터를 건립하고 이를 2세 교육은 물론 각종 단체 행사 및 체육 활동 공간으로 알차게 활용하고 있다. 우리 한인사회도 개인의 성취에만 골몰할 것이 아니라 공적인 영역에도 눈을 돌려 함께 즐기고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줄 수 있는 기념비적인 사업을 일으켜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그레이트파크는 한국인 모두가 힘을 모으기에 아주 좋은 시험 무대가 될 수 있다. 이 프로젝트는 결코 나 개인의 정치적 업적을 쌓기 위한 것도 아니요 특정 부류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영리 사업도 아니다. 이 역사적인 현장에 코리아의 숨결을 불어넣고 영원히 자랑하기 위함이다. 〈계속> 글.사진=올림 출판사

2010-01-21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77] 'OC 그레이트 파크' 미국 대표 상징물 기대···혼신 다바쳐 '어바인 새역사' 만들고 싶다

어바인은 공립학교의 수준이 매우 높다. 매년 실시하는 전국 학력 평가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는 학교가 많아 캘리포니아 주민들이 가장 살고 싶어하는 도시로 손꼽을 정도다. 치안도 훌륭하여 연방수사국이 발표하는 통계에서 지난 수년 동안 전국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로 인정받았다. 시민들의 시정 만족도가 97퍼센트에 이른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교육 여건이 좋다 보니 한국에서 이곳으로 유학 오는 학생들이 유난히 많다. 어바인 교육구에 속한 초.중.고의 학생 수가 2만 6000여 명인데 이 가운데 한국 학생이 무려 4000명에 이른다. 이민자 커뮤니티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 이 때문에 어바인은 '미국의 8학군'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교육열이 높은 한인들은 물론이고 최근에는 경제적으로 기반을 다진 소수계 이민자들이 급속도로 늘어나면서 백인과 아시아계 중동계 남미계 등이 골고루 분포하여 인종적으로도 균형을 이룬 인종 화합적 도시로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공항이냐 공원이냐 지금 어바인에서는 또 하나의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바로 21세기 미국의 최대 공공 프로젝트인 '오렌지 카운티 그레이트파크' 공사다. 뉴욕의 센트럴파크 2배 정도 규모로 미국 최대의 공원이 되는 것은 물론 공원과 함께 각종 문화 시설 등이 갖춰질 예정이다. 아울러 미국을 대표하는 신개념의 상징물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그레이트파크가 들어서는 부지는 어바인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원래는 엘 토로 해병대 공항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1942년 건설되어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중동전쟁 등을 지원해 온 미 서부의 군사 전략 요충지였으나 1999년 연방정부에 의해 폐쇄된 뒤 어바인 시에 귀속되었다. 1000에이커(약 400만 제곱미터)의 생태 보호 구역을 빼고도 3740에이커(약 1480만 제곱미터)의 면적을 지닌 이곳은 가히 오렌지 카운티의 보석이라 불릴 만하다. 공항이 있던 자리여서 개발의 칼날에서 비켜난 덕에 손상되지 않은 자연 경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천혜의 땅이다. 이곳이 어바인 시에 귀속되자 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두고 주민들 사이에 논란이 벌어졌다. 뉴포트 비치 등 전통적으로 보수적 부유층이 주로 사는 지역에서는 상업 공항으로 전환하여 지역 경제를 활성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에 맞서 생활 환경을 중시하는 주민들과 환경보호론자들은 반드시 공원으로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둘 사이의 팽팽한 대립이 접점을 찾지 못한 채 수년간 계속된 끝에 법정 공방으로까지 치달았는데 2002년 주민발의안 투표에서 공원으로 개발하는 안이 통과되었다. 이로써 그레이트파크는 본격적으로 개발 계획이 추진되기 시작해 지금은 설계를 끝마치고 공사가 진행 중이다.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서 어바인 시장을 맡게 된 나의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정말로 큰 영광이고 행운이다. 그레이트파크는 내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할 최대의 역점 사업이다. 2004년 시의원이 되면서 9명으로 구성된 그레이트파크공사위원회에 당연직 위원으로 활동해 오고 있었지만 이제 그 의미와 책임이 더 무거워진 것이다.〈계속> 글.사진=올림 출판사

2010-01-20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76] "아빠는 가족보다 친구와 만나는게 더 중요해?"

인생에서 인연만큼 소중한 것이 또 있을까? 나는 사람과의 인연을 대단히 중히 여긴다. 한번 인연을 맺으면 오랫동안 기억하고 연락이 닿지 않으면 이리저리 수소문해서 다시 인연을 살리고 만남의 기쁨을 최대한 누리며 살려고 한다. 미국에 살면서도 학창 시절의 친구들이 그리워 먼저 연락을 취하고 소식이 끊긴 친구는 어떻게든 찾아내곤 했다. 때로 사람 좋아하는 병 때문에 상처를 받는 일도 더러 있지만 그럴 때는 크게 연연하지 않고 넘기려 한다. 인간관계란 것이 언제나 만족스러울 수 없고 사람으로 인해 상처를 받았다고 인연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9.11테러가 발생했던 2001년 9월 정말 짜릿했던 친구들과의 만남을 잊지 못한다. 그해 9월 15일은 대학 입학 30주년을 맞아 동기들이 대거 뭉치기로 한 날이었다. 마침 모교에서도 홈 커밍 데이 행사를 대대적으로 준비하고 해외에서 활동하는 동기들을 초청해 주었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이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던 중 그 끔찍한 9.11테러가 일어났다. 곧이어 서울행 비행기가 뜨지 못한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나는 서울에 있는 친구들에게 갈 수 없다고 통지하고 애석한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행사 전날 밤 국제선 운항이 다시 허용되면서 친구와 함께 비행기에 몸을 싣고 고대하던 30년 행사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때 고등학생이던 딸아이가 했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빠는 이렇게 위험한 상황에 친구들이 좋다고 가족들 걱정은 하지도 않는 거야?"라며 몹시 몰아세웠다. 더군다나 9월 15일은 내 생일이기도 해서 딸의 서운함은 더 컸을 것이다. 하지만 친구들이 그리운 걸 어쩌랴. 딸을 간신히 안심시키고 겨우 집을 빠져나왔다. 행사장에는 무려 1000여 명의 교우들이 각지에서 모였다. 모두가 얼마나 반가워했는지 모른다. 처음 보는 얼굴들도 있었지만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참석하지 못했더라면 그렇게 좋은 친구들을 사귈 기회를 영영 놓쳤을 것이다. 윤은기 홍용택 이동헌… 정말 내 인생에 소중한 친구들이다. 그들을 새로 만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한다. 친구들은 내 마음을 풍요롭게 만들어줄 뿐 아니라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준다. 나는 시간만 나면 수첩을 뒤척이며 '이 친구는 뭐 할까 이분과는 연락한 지 참 오래 됐네' 하면서 느닷없이 전화를 걸곤 한다. 사람을 좋아하는 것 이것은 나의 불치병이다. 그레이트파크의 꿈 어바인 시는 캘리포니아 LA카운티에서 남쪽으로 약 65킬로미터 떨어진 오렌지 카운티의 중심 도시다. 오렌지 카운티에는 34개의 도시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어바인은 주거와 산업 환경이 균형 있게 발전한 가장 이상적인 계획도시로서 미국 전역에서 명성이 높다. 1966년에 UC어바인대학이 설립되었고 이 대학을 중심으로 발전을 거듭하다가 1971년 12월 어바인 시로 독립되었다. 어바인 시는 원래 어바인 랜치라고 불리는 평원으로 콩밭과 목장 지역이었다. 1866년 제임스 어바인이라는 사람이 구입하여 그 가문에서 소유해 오다가 1960년대 후반에 어바인컴퍼니가 설립된 후 총체적인 마스터 플랜에 따라 차근차근 개발되기 시작했다.〈계속〉 글.사진=올림 출판사

2010-01-19

[OC][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75] 내 주장 보다 상대방 이야기에 귀 기울이려 노력

요즘 나한테 이런 애정 어린 충고(?)를 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다. 시장이 되었으니 교인이 수천 명인 대형 교회에 출석해야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그런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나는 가벼운 웃음으로 대신하곤 한다. 정치적으로 계산하자면 응당 그러는 것이 유리하겠지만 나 개인의 작은 이익을 위해 30년 이상 다니던 교회를 마다하고 다른 교회로 옮기는 것이 스스로 용납되지 않는다. 마치 나 자신을 속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주변을 돌아보면 목사가 마음에 안 든다고 아이들 교육 환경에 좋지 않다고 거리가 멀다고 교인들이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열심히 다니던 교회를 바꾸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도무지 그게 안 된다. 교회를 바꾸는 것이 큰 잘못을 범하는 것도 아닐 터인데 말이다. 조영남씨 말대로 고지식한 건지도 모르겠다. 좀 변통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한 길을 택하면 우직하게 그 길을 걸어가는 스타일은 어쩌면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강씨 고집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나는 일이건 대인관계건 지금 몸담고 있는 공직의 길이건 초심을 지키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뜻을 세우고 발을 내디뎠으면 최선을 다해서 우직하게 나아가려고 한다. 큰 줄기를 세우고 나면 주변의 작은 변화는 좀처럼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세세한 것에 잘 신경을 쓰지 못하는 편이다. 아내와 아이들이 자상한 면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도 충분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아내가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당신은 큰 그림을 그리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추진하고 현명하게 판단해요. 나도 당신과 생각이 달라 어긋날 때도 있지만 지나고 보면 당신의 생각을 따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정치를 하는 공직자로서는 아주 좋은 장점이에요. 그러나 세세한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가족과 친구들로 하여금 섭섭한 생각이 들게 할 때도 있어요." 백번 맞는 말이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미안할 때가 많다. ◇당신 편이 되어 일하겠다 나에게는 세일즈를 할 때나 정치를 하면서 꾸준하게 지켜온 원칙이 있다. 내 주장을 관철하려 들기보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이야기를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여주다 보면 고객이든 유권자든 결국 내가 의도한 대로 내 편이 되어주었던 경험을 수없이 했다. 서킷시티에서 일할 때도 실적을 올리겠다는 조급한 생각에 제품을 무리하게 홍보하는 쪽보다는 고객의 신뢰를 얻는 쪽을 선택했다. 진심을 담아 상대방의 눈을 보며 이야기하고 고객이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느낌이 들도록 설명하고 응대했다. 그렇게 믿음을 주고 고객에게 진심으로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실적은 저절로 좋아졌다. 무명이던 내가 처음 어바인의 시의원으로 출마하여 단기간에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고 당선되었던 것도 다름 아닌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겠다는 전략이 적중했기 때문이리라. '내가 능력 있는 사람이니까 나를 뽑아달라'가 아니라 '내가 당신의 마음을 알고 있다. 당신의 편이 되어서 일하겠다'는 인상을 심어줌으로써 내가 그들의 진정한 대변인이 될 수 있겠다는 확신을 심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런 삶의 방식은 금방 효과를 나타내기 어렵다. 하지만 좀 더딜지라도 결국은 더 큰 과실로 돌아온다는 것을 나는 경험을 통해 터득했다. 〈계속> 글.사진=올림 출판사

2010-01-18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74] 미주 한인들 한국 정치 참여 좋지만 미국서 정치력 키우는 것이 더 중요

해외동포 참정권 어떻게 볼 것인가 한인들이 유권자 등록을 하고 투표에 적극 참여해서 우리의 정치력을 높이자고 역설해 온 나이지만 해외동포 참정권 문제는 좀 복잡하게 다가온다. 유학생이나 단기 체류자 등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하지만 미국에서 계속 살기로 작정하고 영주권을 취득한 한인동포들에게까지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은 좋은 취지인 것은 분명하지만 만만치 않은 과제를 안고 있다. 나는 유대 민족을 상당히 높게 평가한다. 그들은 나라 잃은 민족으로 2000여 년을 차별 속에서 살아오면서도 정체성을 잃지 않았고 지금은 세계 곳곳의 정치와 경제 금융 언론 등에서 막강한 힘을 행사하고 있다. 미국 내 유대인은 불과 700만이다. 오랜 이민의 역사에 비하면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다. 그러나 바로 이들이 미국 정치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각 분야에서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각급 유대인 단체들은 정치인들을 친이스라엘파로 만들기 위해서 많은 투자를 한다. 매년 수천 명씩 이스라엘로 초청하여 자국에 우호적인 인사로 만드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나가고 있다. 나도 미국유대인협회의 초청으로 일주일 동안 이스라엘을 방문해서 중동 문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고 돌아왔다. 그들은 미국인인 동시에 유대인이다. 미국 유대인들은 우리 한인들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지에서 힘을 기르고 현실의 무대에서 성공 스토리를 계속 써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해외에서 생활하는 한인들의 위상이 굳건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그다음의 문제다. 우선적으로 미국 정치에 참여하고 미국 정계에 진출하면서 정치력을 결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한인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은 아직 갈 길이 먼 동포사회의 정치력을 분산시킬 수도 있어 자못 우려스럽다. 또한 선거운동이 본격화되면 자칫 한국의 정치 상황에 따라 한인사회가 양분되어 소모적인 정치적 논란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을까 걱정도 된다. 교회도 친구도 평생을 함께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2008년 11월 말 「월간중앙」과 게릴라 인터뷰를 가진 적이 있다. 가수 조영남씨가 담당하는 '무작정 만나러 갑니다'란 코너를 통해서였는데 무려 7시간 동안의 긴 대화가 이어졌다. 대화의 한 토막을 소개한다. 조영남: 종교는 어떻게 돼요? 강석희: 기독교입니다. 조영남: 언제부터요? 강석희: 사실 미국에 처음 와서 교회에 나가야 한인을 만날 수 있으니 나가기 시작했죠. 한 교회를 31년 동안 섬기고 있습니다. 원래 성격이 얍삽하지 못해요. 조영남: 얍삽이 아니라 고지식하네. 강석희: 원래 강씨 고집이 유명하죠.(웃음) 미국에 오자마자 누님이 다니던 샌타애나 시에 있는 윌셔장로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오렌지 카운티에서는 가장 큰 교회 중 하나였다. 하지만 얼마 후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서 교인 간의 갈등과 이탈의 내홍을 겪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교회가 분열되고 이사 가고 재통합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서로 한 발씩 물러서서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나는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면서 묵묵히 교인으로서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는 동안 윌셔장로교회와 통합한 오렌지카운티의 가나안장로교회에 지금껏 30년 넘게 다니게 되었다.

2010-01-14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73] 모든 정치적 후원금은 상한선 정해져 있어…따라서 후원금 액수는 지지율의 바로미터

'3M의 원칙'에서 한국이 배울 것들 미국 정치에서는 '3M의 원칙'을 자주 이야기한다. 정치를 하려면 3가지 M 즉 자금(Money) 조직(Mechanics) 공약 사항(Message)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3M이 없는 사람에게 정치적 성공은 허황된 꿈에 불과하다. 자금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다. 그러나 투명성이 문제다. 앞서 말한 대로 미국에서는 후원금의 상한선이 정해져 있다. 주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캘리포니아 주는 1인당 2300달러로 제한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후원금은 수표로만 지급해야 한다.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다. 개인 수표나 회사 수표도 가능하다. 현금은 99달러까지만 허용된다. 그에 비해 연방의 상.하원 선거는 개인 수표만 허용되며 회사 수표는 사용할 수 없다. 예비선거 2400달러 본선거 2400달러로 1인당 4800달러까지 지원할 수 있다. 후원금 액수는 지지율을 가늠하는 바로미터다. 미국 대통령 선거를 보면 어느 후보가 모금에서 얼마를 모아 몇 위를 하고 있다는 보도가 자주 나오는데 모금 액수가 곧 돈을 낸 사람의 숫자 즉 적극적인 지지자의 숫자이기 때문에 실제 득표율과 직결된다. 나는 시의원 선거와 시장 선거 때 수만 가구를 발로 뛰면서 지지를 호소했고 다른 출마자들보다 많은 기금을 모았다. 물론 그 뒤에는 항상 한인사회의 든든한 지지가 있었다. 든든한 후원금은 지역사회의 개발업자들이나 시와 관련 있는 단체들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배경이 된다. 나는 이 부분에서 한인사회에 더욱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선거자금법은 공정정치실행위원회(Fair Political Practice Commission)에서 관장한다. 규정을 어겼을 때는 무거운 처벌이 뒤따른다. 선거 자금에 대한 감시가 철저하기 때문에 출마자들은 돈을 엄격하게 관리하고 보고할 수밖에 없으며 기업으로부터 검은돈을 받는 따위의 일은 거의 없다. 만일 정치자금 비리로 구설에 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정치 생명은 이미 끝났다고 보아도 된다. 처벌도 무섭지만 유권자들이 이런 정치인을 다시 뽑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정치인들이 선거를 앞두고 기업이나 지인으로부터 돈을 끌어다 쓰는 악습이 사라지지 않은 듯하다. 당선이 되고 나서 불법 사실이 드러나 불명예 퇴진을 하는 바람에 선거가 끝나면 으레 보궐 선거의 계절이 찾아온다. 지금은 전보다 정치자금법이 강력하게 적용되고 있고 출마자들도 더욱 조심하는 것 같아 다행이지만 한국에서도 미국의 선거 자금 시스템을 참고하여 투명성을 높이는 데 활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3M 중에서 자금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메시지다. 나는 정치에 입문하면서 메시지 전달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알려야 주민들의 신뢰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메시지 전달 능력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것이 곧 표로 연결된다. 메시지는 자신이 어떠한 일을 하겠다는 공약 사항을 알리고 주민들과 약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뢰성과 정확성이 따라야 한다. 또한 가식이 없어야 한다. 아무리 미사여구를 구사하더라도 전달자의 진정성이 약하고 거품에 기초한 메시지라면 수용자는 결코 그 메시지에 마음을 열지 않을 것이다. 이는 비단 정치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원칙이다.〈계속> 글.사진=올림 출판사

2010-01-13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71] 자기 말에 책임 질 줄 알아야 존경받는 정치인···자신보단 주변·사회 바라보는 공인의식 있어야

존경받는 정치인이 되려면 자기 말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하고 자기 자신보다는 항상 주변과 사회를 바라보는 공인 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정치적 리더십은 자기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변의 신뢰와 신임이 쌓이고 쌓여 형성되는 것이다. 그런 리더십을 갖추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적 바탕이 있어야 하고 솔선수범하며 사물 전체를 꿰뚫어보는 통찰력과 감각이 있어야 한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비록 단임으로 물러나긴 했지만 '중동의 평화'라는 숭고한 목적을 위해 재임 시나 퇴임 후에도 변함없이 노력했다. 앨 고어도 대선 때 전국 득표에서는 이기고 개표 논란 끝에 대의원 숫자가 몇 명 모자라 억울하게 선거에서 지고 말았지만 자신의 패배에 실망하지 않고 꾸준하게 환경 운동을 펼쳐 지금은 세계적인 환경 운동가가 되었다. 그는 노벨상 수상자로서 긍정의 에너지를 대통령보다 더 많이 지구촌 사람들에게 퍼뜨리고 있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이 극심할 때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비폭력 평등과 박애를 주장하며 정의를 외쳤다. 그런 씨앗을 뿌려놓았기 때문에 오늘날 버락 오바마와 같은 대통령이 탄생할 수 있었다. 진정한 지도자는 눈앞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 성공과 실패를 넘어선 평생을 두고 자신의 큰 뜻을 관철할 수 있는 정의감과 신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신호범 의원을 닮고 싶은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에게서는 결코 '폴리티션'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정치가가 되려는 게 아니라 봉사를 하고 싶다고 친구들에게 말했듯이 앞으로도 나는 '스테이츠먼'으로서의 신념을 변치 않고 간직해 나갈 것이다. 정치 생활의 편린들 나는 시장 선거에 출마하기 전까지 3년 반 동안 LA에 있는 '라디오 코리아' 방송국에서 매주 금요일 정치 칼럼을 진행했다. 시사와 정치 관련 내용을 다룬 이 프로그램에서 나는 동포 청취자들에게 나의 생각을 알리고 메시지를 전했다. 매주 다른 소재를 찾아 한인사회에 유익한 메시지를 제공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방송 기간 내내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해냈다. 한미민주당협회 회장 어바인 시의원 부시장 등을 거치며 주로 정치권에서 활동하고 있어서 아무래도 정치 관련 이슈들에 치우칠 수밖에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역점을 두었던 이슈는 한인사회의 정치력 신장이었다. 미국에서는 시민권자라도 유권자 등록을 해야 투표할 수 있다. 지금은 시민권을 취득한 한인들이 많아지고 이전보다 참여 의식도 높아져 사정이 좀 나아진 편이지만 내가 시의원에 출마할 당시만 해도 50만 명을 헤아리는 캘리포니아 주 남부의 한인 중에서 30퍼센트 정도만 유권자 등록을 하고 이 가운데 30퍼센트 정도가 투표를 하는 실정이었다. 그러니 15만 명의 한인 유권자가 있다 해도 실제로 투표하는 사람은 3~4만 명에 불과했다. 수십만 명이 몰려 산다고 해도 무슨 소용인가. 정치력을 높여야 한다고 아무리 목청을 높여도 유권자가 투표장에 가지 않는다면 어떤 힘을 쓸 수 있겠는가. 나는 유권자 등록을 해달라고 시시때때로 우리 한인들을 독려했다. 라디오방송에서는 물론이고 신문 칼럼 등을 통해 줄기차게 유권자 등록을 해달라 유능한 한인 후보자를 위해 표를 모아달라고 간청했다. 미국의 지방선거에서는 단 몇 백 표 차이로 당락이 갈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한인 유권자들이 표를 모아주면 더 많은 한인 정치인을 배출시킬 수 있다고 호소했다.〈계속> 글.사진=올림 출판사

2010-01-11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70] 국민에게 봉사하는 자세가진 '정치인' 신호범 의원, 한국인 뿌리지키려 노력하는 모습에 또 한번 감동

신호범 의원은 또 조국과 한국인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품고 사는 진정한 애국자다. 닥터 폴이라는 군의관에게 입양되어 미국에서 성장했지만 자신의 뿌리를 지키기 위해 양해를 구하고 양아버지의 성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고 자신의 성을 그대로 지켜 '폴 신'으로 살아왔다. 지난 2003년 미주 한인이민100주년 기념식을 앞두고는 여기에 참석하기 위해 자신의 직위를 반납하는 일까지 있었다. 신 의원은 당시 한인단체의 초청을 받았으나 주의회가 회기 중인 데다 상원 부의장으로 있어 도저히 참석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신 의원은 하는 수 없이 주지사와 상원의장에게 "한인사회의 중요한 행사라 꼭 가야 합니다. 의회에 누를 끼치고 싶지 않으니 사표를 내고 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감동한 주지사와 상원의장이 그의 의회 결석을 특별히 용인해 주었다고 한다. 한인으로서의 강한 뿌리 의식과 뜨거운 애정이 없었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또 신 의원은 아시아계 이민자를 '오리엔탈'이라고 부르는 데 부정적인 어감이 섞여 있음을 알고 "아시안을 오리엔탈이라고 부르는 것은 흑인을 니그로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하여 워싱턴 주에서 아시안을 '오리엔탈'이라고 부르지 못하도록 하는 법을 발의해 통과시키기도 했다. 조국인 한국에서 지옥과도 같은 어려운 생활을 했으면서도 원망보다는 한국인의 뿌리를 가진 데 자긍심을 갖고 항상 한인사회의 권익 신장을 위해 힘쓰는 신 의원의 모습은 한인 정치인들이 어떤 길을 어떻게 가야 할지에 대한 해답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다. 정치인과 정치가의 차이 '정치인'(Statesman)과 '정치가'(Politician)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폴리티션'이 정략적이고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정치가'의 어감에 가깝다면 '스테이츠먼'은 정도를 걷고 국민에게 봉사하는 자세를 가진 참 공복을 일컫는 말이다. 신호범 의원 같은 분이야말로 '스테이츠먼'의 전형이다. 시의원에 출마했을 때 한국에 있는 오랜 친구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친구는 "석희야 너는 정치하고는 안 맞아. 정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다시 한 번 생각해 봐"라고 조언했다. 물론 '정치가'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권모술수가 난무하고 자신의 영달을 위해 국민을 이용하는 그런 정치가 말이다. 나는 기분이 조금 불쾌해져서 "너는 아직 나를 잘 몰라. 나중에 좀 더 이야기하자"고 대꾸했다. 친구가 나같이 순진한 사람이 정치판에 뛰어들어 마음에 상처를 입을까 봐 염려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은 알지만 나는 그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다. 정치가 얼마나 멋지고 가치 있는 일인지를 누구보다 내 스스로 증명하고 싶어졌다. 시의원에 당선되고 서울을 방문했을 때 대학 동기생들이 마련해 준 축하연에서 나는 정치판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만류한 친구 이야기를 꺼내면서 "내가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말은 나는 정치를 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저 공인으로서 봉사를 한다는 생각만 했다"고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스테이츠먼' '공복'이 되고 싶은 것이 진정한 소망이었고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계속> 글.사진=올림 출판사

2010-01-07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69] 내가 닮고 싶은 정치인의 표상 '신효범' 의원, 그의 말·글은 내가 새겨듣고 실천해야 할 일

쥐 잡아 배 채우던 어린 시절 신호범 워싱턴주 상원의원의 자서전 '사랑하며 섬기며'는 진정한 인간 승리가 무엇인지 과연 정치인의 길은 무엇인지를 뼛속 깊이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어린 신호범은 거지였다. 허기에 주린 배를 움켜쥐고 그가 찾아가는 곳은 남대문 시장통이었다. 떡볶이 노점상 앞에서 침을 삼키며 바라보고 있으면 가끔은 아주머니가 불러서 한 접시 먹으라고 주기도 했다. 하늘이 내려준 꿀맛이었다. 또래 아이들과 함께 여의도 백사장에 가서 사람들이 버리고 간 음식을 주워 먹기도 했다. 쓰레기통을 뒤져서 버려진 음식을 꺼내 먹었다가 식중독에 걸려 길거리에서 데굴데굴 구른 적도 많았다. "어린아이들은 내 얼굴에 침을 뱉고 가방 속에서 나무 필통을 꺼내 사정없이 때렸다. 비가 오는 날에는 진흙탕에 던져졌다. 이렇게 학대를 받다 보니 사람이 두려웠다. 사람에 대한 공포심이 컸지만 그러나 사람을 만나야 구걸을 할 수 있는 거지 신세였기에 곤고한 하루살이가 지옥이었다." 특히나 겨울은 거지 소년에게 죽음과도 같았다. 먹을 것이 없어 처마 지붕 밑에 있는 참새 알이나 새끼는 물론이고 쥐새끼까지 잡히는 대로 깡통에 담아 구워 먹었다. "그리움이나 외로움 같은 정서는 내게 사치였다. 당장 입을 옷이 없고 신고 다닐 신발이 없고 무엇보다 텅 빈 뱃속 때문에 허리를 펼 수 없을 정도로 배를 곯았다. 하늘이 빙빙 도는 빈혈에 시달리며 먹을 것을 구걸해야 하는 배고픈 설움이 하늘에 사무치도록 나를 서럽게 했다." 하루하루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여야 했던 소년은 급기야 해외로 입양되고 초인적인 노력으로 대학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생부와 계모를 찾았고 부모님은 물론 이복동생들까지 모두 미국으로 초청하여 교육을 시키고 사업 자금을 주어 정착시켰다. 한없이 어진 마음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신 의원은 "대개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흐릿하다고 하지만 나의 경우 뼛속에 저린 추억들이 어린 날의 슬픈 상처로 각인되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말한다. 언젠가는 자신의 어려웠던 시절을 이야기하다가 "미국에서는 인종 차별을 받았지만 한국에서는 인간 차별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을 왈칵 쏟기도 했다. 신 의원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아무리 환경이 어렵다 한들 그의 어린 시절만 했으랴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조금만 어려워도 포기하고 절망하는 이들에게 이보다 더 훌륭한 인생 교과서도 없지 않을까. 나 자신도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지금에 이르렀지만 그의 인생 앞에서는 아직도 내 자신이 나약하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정치인은 국민의 종이다 신호범 의원은 내가 닮고 싶은 정치인의 표상이다. 그의 말과 글은 곧 내가 새겨듣고 앞으로 실천해야 할 길이 된다. 신 의원은 '정치인은 국민의 종이다'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적어도 국민을 대변해서 정치 지도자가 되고자 한다면 무엇이 국민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인가를 알아야 한다. 나를 지지해 준 유권자들이 내게 표를 던진 것은 선거공약을 지키라고 요구한 의사 표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정치인은 국민의 종이다. 종이 어떻게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고 주인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겠는가. 나는 이런 신념을 갖고 정치인의 길을 걷고 있다." '본받고 싶은 정치인의 자세'라는 글에서는 "정치인이 주는 것보다 받는 것 헌신보다 누리는 것 겸허함보다 오만함 역사와 국가와 민족보다 현실과 당리와 자신을 더 앞세운다면 정치는 물론 정치가의 미래는 멸망으로 달리는 고장난 기관차에 타고 있는 처지가 된다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며 현실 정치인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보낸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확고한 정치철학이 드러나는 대목이다.〈계속> 글=올림 출판사

2010-01-06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68] 2004년 어바인 시의원 당선…미국 생활 제3막 시작

정치가 항상 내 맘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주변의 많은 사람을 의식해야 했다. 혼자 옳다고 해서 남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는 역풍도 감수해야 했다. LA평화통일자문회의의 국제위원장을 맡고 있을 때 한미의원연맹 행사차 하비에르 베세라 연방 하원의원과 한국에 동행한 일이 있었다. 베세라 의원은 남미계로 하원에서 가장 비중이 큰 예산결산위원회의 선임의원이었다. 3박 4일간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우리는 비교적 많은 곳을 둘러보았다. 베세라 의원은 한국의 발전상을 보고 놀랐다면서 자신이 한인사회를 위해 무엇을 해주면 좋겠는지 물어왔다. 나는 10가지 리스트를 제시했는데 미국 의회가 '한인 이산가족 상봉 결의안'을 통과시켜 달라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미국에 사는 한인 이산가족도 북한을 방문해 가족을 만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얼마 후 이 문제를 평화통일자문회의 국제위원장으로서 본격적으로 해결하겠다고 하자 주변에서 따가운 시선이 날아왔다. 너무 일방적으로 나서지 말라는 암시였다. 활동이 많아지자 부정적인 여론도 그만큼 따라다녔다. 성과를 인정해 주기보다는 지엽적인 문제로 꼬투리를 잡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반발하거나 맞서지 않았다. 한인사회에서 일을 하려면 아무리 작은 문제라도 신경을 써야겠구나 하면서 머리를 숙이고 자세를 낮추었다. 한인사회를 위해 봉사하겠다며 뛰어든 민주당협회 활동 역시 나를 점점 성숙한 정치인으로 변화시키고 정치에 대해 새로운 꿈을 갖게 했다. 어느 새 주위에서 '강석희는 언젠가 정치를 할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돌았다. 2002년 8월 우리 가족은 8년간의 애너하임 생활을 정리하고 어바인으로 이사했다. 거기서 나는 래리 에이그런 시장을 만나 본격적인 정치인의 길로 접어들었고 2004년 어바인 시의 시의원이 되었다. 세일즈맨 한인사회 봉사자에 이어 마침내 미국 생활 제3막이 시작된 것이다. ◇또 한 분의 아버지 신호범 입양아 출신으로 대학교수 워싱턴 주 상.하원 의원을 거쳐 상원 부의장을 지내고 있는 신호범 의원. 그는 나의 정치적 역할 모델이자 정신적 아버지다. 2000년 워싱턴 DC에서 처음으로 대면한 후로 줄곧 나의 정치적 멘토로서 강력한 후원자 역할을 해주고 계시다. 2004년 2만 가구를 목표로 '발바리 캠페인'을 벌이고 있을 때 신 의원은 몸소 워싱턴 주에서 어바인까지 오셔서 나와 함께 가가호호 문을 두드리며 큰 힘을 보태주셨다. 69세로 적지 않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노고를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콧날이 시큰해 온다. 힘드실 것 같아 이제 그만 하시라고 하면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하루 종일 걸어야죠. 나는 하루 종일 걷는 걸 1년도 넘게 해봤어요" 하시며 끝까지 내 곁을 지켜주셨다. 때로는 점심도 거른 채로 부지런히 다니시는 통에 도리어 내 숨이 찰 지경이었다. 잠시 스타벅스에 들러 커피를 마시는 순간에도 홍보 책자를 돌리시며 간곡히 한 표를 부탁하셨다.〈계속> 글.사진=올림 출판사

2010-01-05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67] 한미정치인 한마당 축제 '한미 정치인 오찬'…한인사회 정치 이정표 세운 기념비적 행사

영어권 젊은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 민주당 조직과 1세 한국어권 위주로 구성된 민주당 조직이 합쳐지면서 나는 더욱 힘을 받게 되었다. 한미민주당협회의 조직력도 더욱 단단해졌다. 한인사회에서도 바람직한 일이라며 두 단체의 통합을 반겼다. 2000년 8월 LA에서 열린 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 대회 둘쨋날인 15일 한인사회에 기념비적인 행사가 마련되었다. 우리 협회가 주관한 '한미 정치인 오찬 행사'가 열린 것이다. LA 다운타운에서 열린 이 행사에는 전당대회장 테리 매칼리프가 환영사를 해주었고 노먼 미네타 상무장관 게리 락 워싱턴 주지사 빌 로키어 검찰총장 외에도 연방 상.하원의원 등 비중 있는 정치인들이 참석했다. 마침 그때 한국에서 온 14명의 국회 참관단도 함께하게 되면서 참여 인원이 500여 명을 넘어섰다. 이날의 행사는 한미 정치인들의 한마당 축제로서 한인사회에 중요한 정치적 이정표를 세운 기념할 만한 사건이 되었다. LA타임스는 이 행사를 대서특필하면서 한인사회의 정치적 신장을 집중 조명했다. 민주당 전당대회의 공식 일정으로 채택된 데다가 민주당의 거물들이 그것도 특정 소수계 커뮤니티가 주최한 행사에 대거 참석한 것은 사상 유례가 없는 일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한인 언론들도 이 행사를 상세하게 보도하면서 큰 의미를 부여했다. '높아진 한인 정치력의 수준을 보여준 행사였다' '한인 정치력 신장의 가능성을 열었다'며 높이 평가했다. 한미민주당협회는 단번에 전국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나 또한 지역의 정치 활동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전 민주당 조직에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이에 앞서 앨 고어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전국 대의원으로 선임되기도 했지만 이 행사의 성공에 고무되어 나는 더욱 적극적으로 선거 캠페인에 뛰어들었다. 테네시주 워싱턴 DC 등 장소를 불문하고 고어의 당선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녔다. 하지만 결과는 패배였다. 54만 표를 더 받고도 미국 선거의 전통적인 선거인단 제도로 인해 우리가 밀던 앨 고어는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 나는 너무 억울한 나머지 선거가 끝난 다음에 한참 동안을 앓아누웠다. 그럼에도 그간 한인사회가 민주당에 대해 갖고 있던 인식에 변화의 조짐이 나타난 것은 드러나지 않은 큰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예비선거와 각종 설문 조사를 검토한 결과 공화당 지지세가 강했던 한인사회에 민주당을 선호하는 양상이 뚜렷해진 것이다. 한미민주당협회의 활동상에 대해 언론과 여론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우리는 좀 더 실질적인 권익 향상 운동을 벌일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우리가 직접 이슈를 제기하고 관철시켜 나가기로 했다. '정치 참여'를 하기로 한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주지사나 주요 정치인들을 한인타운으로 초청하여 한인사회 이슈에 대한 입장을 듣고 해결 방안을 촉구했다. 또 한인사회의 목소리를 담아 관련 정치인들에게 압력을 가했다. 정말이지 정치란 하면 할수록 재미있고 보람 있는 일이다. 아무리 잘나가는 정치인이라도 한인들이 힘을 모으면 언제든지 우리에게 주목한다는 사실을 여러 행사를 통해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어차피 정치인이란 여론에 죽고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여론을 잘 조직하여 제시하면 어렵지 않게 그들을 움직일 수 있었다. 또 한인사회와 주류 정치인들의 만남을 통해 한인사회 전체가 서서히 정치력 신장의 중요성에 눈뜨게 된 것도 큰 소득이었다. 정치에 대해 가졌던 막연한 두려움도 많이 없어졌다. 각종 정치 행사를 경험하면서 특별한 연줄이 없더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는 자신감도 생겼다.〈계속> 글.사진=올림 출판사

2010-01-04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66] 2000년 10월 '클린턴 방북단'에 동행 확정…앨 고어 대통령 선거 패배로 아쉽게 무산돼

두 번의 만남을 통해 나는 클린턴의 신도가 되었다고 할 정도로 그에게 푹 빠졌다. 상대방을 사로잡는 대정치가의 면모 인간적인 모습의 실체를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다. 2000년 9월 북한의 조명록 차수가 미국을 방문해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초청 만찬에 참석했을 때 나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북한 측 인사들과의 조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날의 분위기는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반갑습니다'라는 북한 유행가가 연주되었고 서로 술잔을 부딪치며 건배하던 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그 자리에서 올브라이트 장관은 조만간 북한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 후 나는 바버라 박서 캘리포니아 주 상원의원으로부터 비밀 편지를 받았다. 10월 중 클린턴의 방북대표단에 나를 한인 대표로 추천했다는 내용이었다. 얼마 후 다시 백악관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확인 편지를 보내왔다. 역사적인 현장에 동행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몹시 흥분되었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의 첫 방북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앨 고어 민주당 후보가 대통령 선거에서 실패한 탓이었다. 정말이지 안타까운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이 성사되었더라면 미.북한 관계는 물론 남북한 문제에도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커져가는 한인사회의 목소리 나는 한인민주당협회 회장으로서 한인사회와 미국 정치인들 간의 가교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당시 제임스 한 LA 시장 길 가세티 LA 시 검사장 주지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한인 공직 진출을 위한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했고 2000여 개의 임명직 주 공무원 중에서 최소 5퍼센트를 한인들로 임용하겠다는 약속을 그레이 데이비스 신임 주지사로부터 받아내기도 했다. 그동안 한인사회와 연결 고리가 없었던 미국 정치인들도 한인민주당협회를 다리 삼아 한인사회에 등장하는 횟수가 점점 늘었다. 그들은 한인들의 모임에 나와 정치적 소신을 피력하거나 지지를 구하고 한인사회의 요구를 경청하기도 했다. 그러자 한인사회의 정치적 권익 신장 차원에서 매우 바람직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칭찬이 여기저기서 나오기 시작했다. 한인 언론의 조명을 받는 일도 많아졌고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여 한인사회의 정치 판도를 바꾸어놓고 있다는 평가도 받았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돌아간 것만은 아니었다. 호사다마랄까 내가 민주당의 간판 인물처럼 한인 언론에 자주 등장하자 그동안 한인사회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한미민주당협회 소속 1.5세 2세 후배들로부터 불만이 제기되었다. 기존의 민주당 조직이 있는데 왜 하나를 더 만들어 분열의 인상을 주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후배들을 설득했다. "한인민주당협회는 기존 조직을 분열시키려는 의도는 조금도 없다. 영어권의 한미민주당협회가 한인사회와 연결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워 만든 것다. 언제든지 통합하고 함께 힘을 모을 준비가 되어 있다." 내 진심을 이해한 리처드 최가 중간에서 다리를 놓아 두 단체의 통합을 협의하게 되었다. 우리는 곧 협상에 들어가 결론을 내렸다. 명칭은 내가 만든 단체의 이름을 포기하고 한미민주당협회로 하기로 하고 통합 대회를 갖기로 했다. 통합 대회에서 양쪽 인사들은 나를 새 회장으로 추대했다.

2009-12-30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65] 백악관 초청으로 클린턴 대통령과 만남···세계 지도자로서 풍기는 아우라에 빠져

1998년은 클린턴 대통령 2기의 중간선거가 있는 해였다. 나는 캘리포니아 주 상원의원 후보인 바버라 박서 후보를 지지하는 캠페인에 참여해 열심히 선거운동을 도왔다. 10월에 베벌리힐스에서 바버라 박서 후보의 기금 모금 파티가 열렸다. 나로서는 민간 정치 운동가로 변신한 후의 첫 행사였다. 그 파티에서 후원차 방문한 빌 클린턴 대통령과 처음으로 만날 수 있었다. 그와의 우연한 만남은 나에게 또 하나의 영감을 불어넣어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카리스마가 철철 넘치는 인물이었다. 그는 일일이 한 사람씩 악수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 나는 잠시 무슨 말을 건넬까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막상 악수를 하고 한마디 하려는 순간 말문이 콱 막혀버렸다. 그에게서 풍기는 세계 지도자로서의 위엄에 압도당하고 만 탓이었을까.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하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난생처음으로 만나는 미국 대통령의 아우라는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나는 맨 앞자리에 앉아 클린턴의 연설을 귀담아들었다. 처음에 원고를 꺼내는가 싶더니 안경을 가져오지 않아 읽을 수가 없다며 조크를 던지는 것으로 시작된 그의 연설은 1시간이 넘도록 경제 사회 국제 관계를 넘나들며 청산유수처럼 흘러갔다. 정말이지 달변이었다. 조금도 막힘없이 자신의 생각과 비전과 현실 문제의 해법을 설파하는데 나는 물론 온 장내가 그의 마력에 빠져들어가는 듯했다. 국 상류사회의 유명인들이 대거 참석하는 이런 행사에 함께하기는 내 생전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 자리에 한인은 나밖에 없었다. 한인민주당협회 회장이라는 타이틀 덕분에 유명 인사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날의 분위기에 고무된 나는 정치인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눈 녹듯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생각과 비전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사람들의 박수를 이끌어내는 정치인에게서 어떤 독특한 매력을 발견했다고나 할까. 현실 정치에 뛰어들겠다는 생각이 아직은 없던 때였지만 정치인도 얼마든지 멋있을 수 있다는 마음을 품게 만들어준 자리였다. 1년여의 시간이 흐른 1999년 12월 나는 백악관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청되어 클린턴 대통령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스캔들로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맞았고 개인적으로도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우리는 차례로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가 인사를 나누었다. 첫 만남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꼭 대통령을 위로하고 힘을 주는 말을 하리라 다짐하며 내 차례를 기다렸다. 드디어 클린턴과 악수를 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물론 그는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나는 손을 잡은 상태에서 자기소개를 간단히 하고 "우리는 지금 대통령이 가장 힘들 때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인사회는 당신을 전적으로 지지합니다" 하고 말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귀를 기울이던 클린턴 대통령은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온몸에 전기가 쫙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 낮고 굵은 목소리로 "생큐 베리 머치"라고 말했다. 내가 던진 위로의 한마디에서 진심을 감지한 것 같았다. 나 역시 그의 목소리에서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심정을 읽고 몹시 흐뭇했다.〈계속> 글.사진=올림 출판사

2009-12-29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64] 98년 한인사회와 호흡하는 민주당 조직 결성···'한인민주당협회' 초대 회장으로 정치 입문

한인사회에 본격적으로 발을 담그기 전에는 내가 한인사회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한인사회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장학재단 일을 계기로 서서히 나와 한인사회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임을 알아갔다. 새로운 사람들을 계속 알게 되었고 점점 네트워크가 넓어졌다. 나는 사람을 만나고 알아가는 재미에 푹 빠졌다. 나는 내가 두 번째 새로운 인생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번째 인생의 길잡이는 바로 한인사회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었고 동포사회를 위해 작은 힘이라도 보태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이었다. 나를 포용해 주고 인정해 주는 한인사회에 대한 열정은 갈수록 뜨거워졌다. 나는 한인사회 안으로 더 깊숙이 몸을 담글 마음의 채비를 갖추었다. 민간 정치 운동가로서 첫발을 떼다 1998년 초 LA에서 고려대학교 해외 석탑제가 처음으로 열렸다. 나는 선배들의 요청으로 기획 준비를 맡아 행사에 필요한 프로그램과 물품들을 착착 준비했다. 김정배 총장과 많은 고대교우회 임원들이 참석한 해외 석탑제는 성공리에 끝났다. 나 역시 준비를 지휘한 사람으로서 보람이 컸다. 행사가 끝난 후 당시 동창회장을 맡고 있던 민영흡 선배가 나를 불렀다. "몇 년 동안 자네를 유심히 봤는데 참 열심이더군. 봉사 정신도 투철하고 영어도 아주 잘하고 사람들을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냐. 이번 행사가 아주 깔끔하게 끝난 것도 자네 공이 크네. 리더십도 대단해. 그래서 하는 말인데 혹시 정치할 생각 없나? 정치 한번 해보지 그래." 그 선배는 정치에 관심이 많은 분이었다. 그런 선배가 미국 사회에서 경험한 것도 많고 정치적인 감각도 충분한 것 같으니 한번 나서보라고 나를 부추긴 것이다. 이미 한인사회를 위해 봉사하기로 마음을 먹고 있던 나는 선배가 던진 '정치'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어떻게 하면 이 미약한 한인사회의 정치력을 키워나갈 수 있을까? 정치라는 미풍이 내 마음을 살짝 건드리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때 내가 맡은 한인사회 일은 한미장학재단 이사가 유일했다. 장학재단은 비영리.비정치 단체다. 장학 사업만 하는 순수 민간단체이기 때문에 한인 커뮤니티의 권익이 걸린 각종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일은 없었다. 정치적 목소리를 내고 한인들의 힘을 결집하려면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했다. 혼자서는 아무리 뛰어보았자 한인사회의 정치력 향상을 도모하기 어렵고 설사 한다 해도 별 효과는 없을 것 같았다. 조직을 통해야만 많은 일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인사회는 전통적으로 보수 성향이 짙어 공화당 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공화당 쪽 지지자 모임인 한미공화당협회가 간간이 활동하고 있을 뿐 민주당 조직은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민주당 출신인 빌 클린턴이 대통령으로 있던 시절이었는데도 말이다. 영어권 1.5세 2세들을 중심으로 한 한미민주당협회라는 조직이 있긴 했지만 1세 한국어권 중심인 한인사회와는 긴밀하게 연결되지 못하고 있었고 이렇다 할 활동도 없었다. 나는 뜻을 같이하는 한인 1세들을 중심으로 한인사회와 호흡을 함께하는 민주당 조직을 결성하기로 했다. 1998년 여름 '한인민주당협회'를 창립하고 내가 초대 회장에 취임했다. 정치인 아닌 민간 정치 운동가의 길을 가기 위한 첫 단추를 꿴 것이.〈계속> 글.사진=올림 출판사

2009-12-28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63] 미래의 한인사회 이끌어갈 인재 선발…장학재단서의 활동은 의외로 큰 보람

남을 돕는 기쁨 새로운 인생의 시작 장학재단에서의 활동은 생각보다 보람이 큰 일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적당히 장학금을 지급하는 일이려니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수많은 신청서를 읽고 정말로 도움이 절실한 학생을 찾아내서 희망과 의지를 북돋워주는 일이었다. 일을 하면 할수록 이것이야말로 미래의 지도자를 발굴하는 중차대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학생들이 졸업을 하고 사회에 나가 다시 한인사회를 위해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장학재단이 큰 역할을 할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한번 심사에 들어가면 보통 200여 통이 넘는 에세이들을 읽어야 했다. 어느 학생이 장학금이 더 절실하게 필요한지를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구구절절한 사연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번은 백만장자 아버지를 둔 아들이 사연을 보내왔다. 한순간의 실수로 패가망신한 아버지가 충격을 받은 나머지 도박에 손을 댔고 그로 인해 남은 재산마저 모두 날리고 말았다. 동생은 동생대로 어긋나기 시작하더니 결국은 갱단에 들어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나마 어머니가 재봉일을 하셔서 한 달에 800달러 정도 벌어들이는 것으로 겨우 입에 풀칠하면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으니 꼭 학비를 지원해 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장학금 수혜자로 선발된 후 수여식에서 감동적인 소감을 밝힌 학생도 있었다. 하와이에 살고 있는 입양아 출신 학생인데 본인은 장애인이었고 입양 부모는 매우 가난했다. 어려운 와중에 1000달러의 장학금을 받게 되었으니 기쁨도 기쁨이려니와 학생에게는 단순한 장학금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학생은 그동안 잊고 있던 한인으로서의 뿌리와 정체성을 재삼 확인하게 되었다면서 나중에 성공해서 꼭 보답하겠다고 하여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의 눈시울을 젖게 만들었다. 알핀 홍이라는 신예 피아니스트를 도와준 일도 잊을 수 없다. 그는 부모가 모두 의사인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고모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음악가적 자질을 연마하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스트라빈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1등을 하고 미국 교향악단이 뽑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신예'로 뽑히기도 했다. 우리 장학재단은 이 유망한 청년 음악가에게 3년 동안 5000달러의 특별 장학금을 수여하고 기금 모금을 위한 콘서트도 마련해 주는 등 여러모로 도와주었다. UCLA를 졸업한 그는 줄리어드 음대 대학원에 진학해서 지금은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었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장학재단을 찾아와 후배 학생들을 위해 찬조 연주를 해주고 있다. 한인사회의 미래를 이끌어갈 꿈나무들을 발굴하고 격려한다는 것은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보람찬 일이었다. 현실의 장벽에 막혀 미래의 꿈을 접을 위기에 처한 학생들에게 용기를 주고 이들이 다시 힘을 얻어 건실한 사회인으로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것이 바로 한인사회의 힘을 키우는 밑거름이 되리라는 나의 믿음도 더욱 강해졌다. 그뿐이 아니었다. 한미장학재단 이사와 서부 지역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비로소 나는 봉사의 참 의미를 깨달아갔다. 내 시간과 돈을 들여 봉사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인지는 해보지 않고는 절대 모른다.

2009-12-24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62] 돈은 벌었지만 보람을 찾지 못하던 터에 한미장학재단 봉사 제안받고 즉시 수락

동포들의 절망과 고통이 가슴을 후벼팠다. 내 동포들이 이렇게 고통을 겪고 있는데 나는 무엇을 했나. 나 한 사람 내 가정만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왔던 나의 이기적인 모습이 떠오르며 자괴감이 몰려들었다. 총을 들고 필사적으로 가게를 지키는 동포들을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진한 동포애를 느꼈다. 그들의 절규와 아픔이 바로 내 아픔이었다. 한인사회는 결코 내가 외면해서도 외면할 수도 없는 나의 공동체였다. 우리가 정치적인 힘이 있고 발언권이 있었다면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고 백인들처럼 생명과 재산을 지킬 수 있었을 것 아닌가. 나도 모르게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미국 내 한인동포가 200만을 헤아린다고 하지만 흩어져 있는 모래알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누구 하나 한인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존재가 없다니 이 얼마나 슬픈 현실인가. LA 경찰은 정치적 영향력이 큰 백인 부유층 지역은 철통같이 보호해 주었지만 한인사회처럼 정치적으로 무력한 동네는 외면한 채 폭도들이 마음껏 약탈하도록 방치했다는 비난을 들었다. LA폭동을 계기로 한인사회에서는 정치력 부재에 대한 자성이 일기 시작했고 그동안 먹고 살기에만 급급한 나머지 다른 커뮤니티와의 유대 관계를 소홀히 해왔던 점을 깨달았다. 정말이지 엄청난 값을 치르고 나서 얻은 뼈아픈 교훈이었다. 흑인 동네에서 장사해서 번 돈으로 고급 승용차를 몰고 좋은 집에 살면서 주변의 못사는 흑인들을 돕는 데는 상당히 인색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흑인들이 한인 업주의 고급 승용차를 보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자기네들끼리만 잘 먹고 잘산다며 반감을 품을 만도 했다. 폭동은 한인사회에 깊은 상처와 뼈아픈 반성을 남겼다. 나 역시 한인사회를 위해서 뭔가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비즈니스에서 탄탄한 기반을 잡아 돈도 제법 벌었지만 더 이상 큰 보람을 찾지 못하던 터였다. 나는 마침내 나만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한인사회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되돌아보면 LA폭동은 그 자체로도 엄청난 사건이었지만 내 인생에 큰 전환점을 가져온 결정적 계기였다. 또한 그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커다란 영적인 힘이 작용한 결과이기도 했다. 사회 활동의 첫걸음을 내딛다 일단 마음은 정했지만 어디서 어떻게 활동을 시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무렵인 1993년 초 내가 다니던 교회의 교인인 김기순 선생이 어느 날 나를 불렀다. 선생은 한인 1세대의 상징적 인물인 김명한 옹의 막내아들로 한인들이 존경하는 어른이었다. 한인사회의 첫 1.5세 2세가 중심이 된 '한미연합회'(Korean American Coalition)와 '청소년회관'(Korean Youth Community Center)을 설립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선생은 1955년 19세의 나이로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LA로 유학을 왔다고 한다. 그런데 도착한 날이 2월 28일 바로 3.1절 전날이었다. 그는 그 어린 나이에도 3.1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수소문을 해서 LA 시내에 있던 '대한국민회'를 찾아갔다. 다음 날 3.1절 행사에 참석한 것은 물론이다. 애국심 넘치는 선생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다. 한편 선생의 부친 김명한 옹이 창업한 '김방아'란 떡집은 한인들 사이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가 되었다. 지금도 후손들이 LA 코리아타운 한복판에 그 정겨운 간판을 내걸고 운영하고 있는데 한인사회의 역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정표가 되고 있다. 김기순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서킷시티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선생이 구입한 워크맨에 문제가 생겨 애프터서비스를 제공하러 갔다가 처음 만났고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다시 우연히 마주쳤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25년 이상 같은 교회의 교인으로 지내왔다. 선생은 나를 불러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한미장학재단의 이사로 참여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바로 이거다' 하는 생각에 감사한 마음으로 그 자리에서 동참의 뜻을 밝혔다. 평소 존경하는 분의 권고이기도 하거니와 어떤 형태로든 한인사회를 위해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게와 교회밖에 몰랐던 나는 이 모임을 통해 비로소 사회활동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2009-12-23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61] 한인업소에 약탈·방화 자행한 LA폭동은 나와 한인사회를 다시 보는 계기 만들어

내 눈을 뜨게 한 LA폭동 1992년은 내 인생의 큰 전환기가 된 해였다. 업계 정상에 오른 이후로 잠시 내리막길을 걷던 서킷시티는 재기를 위해 온 힘을 쏟고 있었다. 나 개인적으로는 승진할 때가 지났는데도 내 위로 계속해서 백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오면서 이제 정든 회사를 떠나야 하는 게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여러모로 불투명하고 쉽지 않은 나날을 보내고 있을 즈음 LA흑인폭동이 발생했다. 4월 29일 LA 남부 지역에서 시작된 폭동은 단숨에 전 방위로 퍼져 나가면서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폭도들은 LA를 무법천지로 만들었고 닥치는 대로 가게에 난입해 물건을 훔쳐 달아나고 불을 질렀다. 그들은 주로 리커 스토어술과 잡화를 파는 소매점와 마켓 같은 곳을 집중적으로 약탈했는데 절반 이상이 한인이 운영하는 업소였다. 한인 라디오방송 '라디오코리아'는 피해를 당한 한인 업주들의 절규를 하루 종일 생방송으로 전했다. TV에서는 불에 타서 재만 남은 생계의 터전에서 넋을 놓고 울부짖는 여성을 종일 보여주었다. 급기야 한인 대학생이 폭도의 총에 맞아 숨지는 일까지 벌어졌다. 어딜 가든 안전하다고 마음 놓을 곳이 없었다. LA 남부 지역뿐 아니라 곳곳에서 충동적인 약탈과 방화가 잇따랐다. 한인 업소들이 밀집해 있는 LA 코리아타운에서는 업주와 종업원들이 총을 들고 옥상에 올라가 대치하는 그야말로 전쟁터와 다름없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계속되었다. 폭동이 발생하기 얼마 전쯤 어느 한인동포가 운영하는 리커 스토어에서 흑인 여학생이 오렌지 주스를 훔쳐 달아나다 여주인의 제지를 받는 과정에서 총에 맞아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여학생이 휘두르는 폭력에 여주인이 총으로 대응하다 벌어진 사고였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흑인사회가 동요했다. 한인들이 흑인을 차별하기 때문에 이런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다며 이를 인종갈등으로 몰아가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한인 업주들은 물론 한인사회 전체가 흑인들의 보복이 있을까 봐 전전긍긍했다. 보호받지 못한 한인사회 이런 와중에 폭동이 일어나자 한인들은 공포의 도가니에 빠졌다.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폭도들이 한인 점포를 의도적으로 약탈하고 경찰은 방관하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흑인들이 그동안 한인 업주들에게 쌓아둔 나쁜 감정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라는 말도 나왔다. 일각에서는 경찰이 이 폭동을 한인과 흑인 또는 한인과 라티노 이민자 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규정하여 수수방관하며 백인들만 보호하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당시 서킷시티에 근무하면서 신발 가게 3곳을 운영하고 있던 나는 LA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직접적인 피해를 보지 않았지만 매일같이 TV와 라디오를 켜놓고 초조한 심정으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망연자실했다. 700여 개의 한인 업소가 불에 타고 피땀 흘려 모은 동포들의 재산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해버리는 참상을 보고만 있어야 하다니. LA폭동은 회사에서 유리천장의 한계에 부딪혀 진로를 고민하던 나에게 전혀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전환하게 만들었다. '민주주의의 표본이자 축복의 땅이라는 미국에서 어떻게 이렇듯 비민주적이고 야만적인 사태가 일어날 수 있는가 내가 너무 개인적인 문제에만 집착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한인동포들은 절규하고 있는데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이런 생각들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한참 동안 미적거려 왔던 사표를 당장 던지기로 마음먹었다. 미국에 온 뒤로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정작 동포들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LA를 중심으로 형성된 한인사회는 나와는 별 관계가 없는 곳이었다. 한인 타운도 가끔 친구를 만날 목적으로 잠깐씩 찾았을 뿐 나는 여전히 미국 회사에서 타 인종을 상대로 장사하는 한인사회의 이방인일 뿐이었다. 내가 한인들과 교류하는 곳이라곤 교회뿐이었다.

2009-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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